달리기 말고 하루키의 수영 이야기 - by 물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소설가로서 끊임없는 집필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그의 규칙적인 생활을 이루는 잘 알려진 한 축은 바로 달리기입니다. 달리기하면 하루키이고, 하루키하면 달리기가 떠오를 만큼 그는 달리기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루틴 생활에 대한 열풍이 일면서 덩달아 하루키의 시간과 달리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루키가 달리기만큼 소중히 생각했던 운동은 바로 수영입니다. 단행본으로 나온 경력이 있는 달리기와는 달리, 수영을 주제로 한 책은 따로 나온 바 없지만, 하루키의 책 군데군데 수영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묻어 있습니다. 달리기에서의 주요 관심사가 마라톤이었다면, 수영에서도 장거리 수영 종목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보입니다. 그는 운동할 때 속도를 즐기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을 선호했던 타입 같습니다. 싸움을 선호했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그의 소설가로서의 직업과도 자연스럽게 오버랩됩니다.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16)에서는 주로 달리기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만, 책 말미에 수영에 대한 내용도 일부 수록돼 있습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그의 수영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압축돼 전해집니다.

오후에는 체육관의 풀에서 1,300미터를 수영하고, 저녁에는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16) p.49

하루에 두 번 수영은 수영인들에게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죠. 하루키는 장소를 바꿔가며 수영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주로 1,000m에서 1,500m의 거리를 자유형으로 수영했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트라이애슬론 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트라이애슬론은 수영-사이클-달리기로 구성돼 있는데, 수영의 경우에는 1,500m를 헤엄쳐야 합니다. 수영은 트라이애슬론에서 가장 까다로운 종목으로 손꼽히는데요. 실내수영장이 아닌 강이나 바다에서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변수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영장에서도 바다에서도 비교적 편하게 장거리를 자유형으로 헤엄칠 수 있다. 보통 1,500미터를 33분 정도로 헤엄칠 수 있다. 별로 빠르지는 않지만 경기에 참가하면 충분히 겨룰 만한 페이스다. 바다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데도 익숙해져 있다. 항상 수영장에서 연습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게 어렵거나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흔히 있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오히려 바다에서 수영하는 쪽이 수면도 널찍하고 부력이 있는 만큼 수영하는 데는 여간 용이하지 않다. 그런데 막상 실제 레이스에서는 왠지 잘 헤엄칠 수가 없다. 하와이 틴맨 레이스에 출전했을 때도 자유형으로 수영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막상 수영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16) p.238

처음 트라이애슬론에 출전했을 때 출발선은 바다 속에 있었다. 플로팅 스타트(물 위에 떠서 출발하는 스타트 방법), 즉 물속에서 한 줄로 서서 스타트한다. 이때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몇 번인가 강하게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경쟁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다들 앞서기 위해서 최단 코스를 차지하려고 한다. 수영을 하면서 팔꿈치에 맞거나, 발로 걷어차여서 물을 마시게 되거나, 고글이 벗겨지거나 하는 일은 일상다반사라고 할 수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16) p.239

같은 수영이지만 수영장에서 하는 수영과 강 혹은 바다에서 하는 수영은 천양지차입니다. 저도 바다 수영에 대한 경험이 짧게 있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옆에 잡을 수 있는 레인이 없다는 생각에 공포심을 느꼈거든요. 아무리 수영장에서 단련된 수영인도 망망대해에 놓이면 자신의 수영에 대해 번번이 의심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트라이애슬론 경기에는 참여한 적 없지만, 하루키의 대회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읽고 있으면 지금 경기에 함께 참여한 것처럼 긴박감이 전해집니다. 하루키는 트라이애슬론 특정 경기에서 수영을 하다가 도중에 중단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전문 수영 코치를 찾아가 지도를 받게 됩니다.

맨투맨으로 수영하는 자세를 바로잡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수영법을 송두리째 버리고 제로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한 건 아니다. 내 생각이지만 전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백지상태에서 가르쳐 나가는 것보다 어느 정도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의 폼을 고쳐 나가는 쪽이, 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더 어려울 것이다. 한번 몸에 밴 변칙적인 수영법을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억지로 자세를 완전히 바꾸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미세한 방법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서 고쳐 나갔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016) p.242

처음 수영을 시작한 사람과 이미 수영을 오래 한 사람의 강습 방식은 조금 다르게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하루키의 말처럼 강사 입장에서 까다로운 쪽은 하루키와 같이 수영을 오래 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법에 대한 많은 습관이 베어져 있을 테니까요. 단순히 기술적인 접근으로만 해결하기에는 강사와 학습자 모두 어려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큽니다. 수영 습관은 두려움, 싫증, 편안함 등의 정서적인 면과도 지독하게 얽혀 있습니다. 수영인들은 수영하면서 수면 아래의 고요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부단히 시끄러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에세이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에서 주인공 쓰쿠루는 수영을 즐깁니다. 고교 시절 전부라고 생각했던 친구 집단에서 쫓겨난 쓰쿠루는 방황하다 대학에 입학해 수영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루키처럼 쓰쿠루 역시 수영장에 가서 1000m에서 1500m를 헤엄칩니다. 지난 시절 친구 집단으로부터의 상처와 타고난 내향적인 성정으로 그는 친구를 부러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 반경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러다 쓰쿠루는 새로운 친구 하이다를 자신의 소중한 생활 공간인 수영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쓰쿠루처럼 그도 매일 아침 일찍 혼자서 수영을 하러 왔다. 둘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고 말도 주고받게 되었다. 수영을 한 다음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카페테리아에서 함께 간단히 아침을 먹기도 했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보다 두 살 아래로 물리학과 학생이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p.66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만나 같이 수영을 했다. 둘 다 크롤로 장거리를 헤엄쳤는데 하이다가 조금 빨랐다. 어릴 적부터 교습을 받아 체계적으로 배운 덕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아름다운 자세였다. 견갑골이 수면을 스치듯 하며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답게 움직였다. 그러나 하이다에게서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를 교정받고, 의식적으로 근육 훈련을 하자, 이윽고 쓰쿠루도 그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p.70

수영장에서의 우정은 좀 재미있게 형성됩니다. 수영을 하면서는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르면서 영법을 지그시 바라보거나 그의 규칙적인 킥의 리듬을 세어보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소통의 방식일 것입니다. 어떤 우정은 많은 대화를 통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고서도 이뤄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수영장에서 따르는 우정의 방식은 후자에 가깝겠죠?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 쓰쿠루와 쓰쿠루의 수영을 응원하게 됩니다. 소설에서 쓰쿠루의 수영이 나오는 구간은 쓰쿠루와 독자 모두에게 잠시 감정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곳입니다. 어떤 때에는 쓰쿠루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겨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다음 페이지쯤에 수영하는 장면이 나오기를 한 명의 독자로서 혹은 한 명의 수영인으로서 바랐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키는 그렇게 순순히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매서운 수영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수영을 하면 몸에 쌓인 피로가 풀리고 긴장한 근육도 풀어진다. 물속에 들어가면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1주일에 이틀, 30분 정도의 수영으로 그는 몸과 정신의 균형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물속은 사색하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일종의 선 수행 같은 것이다. 일단 운동 리듬을 타면 사고를 아무런 속박없이 자유롭게 떠가게 할 수 있다. “헤엄치는 건 하늘을 나는 것 다음으로 좋은 거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p.273-274

에세이와 소설을 통해 하루키의 수영을 바라보는 경험은 흥미로웠습니다. 수영인이 아니라면 절대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을, 더군다나 묘사의 대가로 손꼽히는 하루키의 시선으로 수영을 만나는 일은 책이 작은 수영장이 되는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수영장에 가면 하루키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 같습니다. 하루키의 운동으로 달리기만 알려진다면 하루키와 하루키의 수영이 무척 서운할 것 같네요. 이제는 수영장에 내리쬐는 햇살을 잠시 하루키의 수영을 비추는 쪽으로 사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