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물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았던 것 같다. 정확히는 물의 물성에 대한 얘기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 넘치는 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친 것처럼 나도 전혀 다른 의미이지만 수영장에서 동일한 감탄사인 유레카를 속으로 외쳤다.

수영장은 물을 느끼고 이해하기에 적확한 장소다. 28도에서 30도 사이를 유지해야 하는 수온은 체온보다 낮게 설정돼 있기 때문에 들어갈 때마다 늘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는 평온해질 법도 한데 차가운 물 온도에 근육은 화들짝 놀라 몸 전체가 호들갑 상태가 된다. 모든 종류의 만남이 그렇듯 자신의 영토를 쉬이 내어주지 않는 법은 수영장 물과의 만남에서도 동일하다.

다음은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게 편안해야 한다. 사람은 아가미가 없기 때문에 물속에서 호흡할 수가 없지만, 수영할 때는 물속 호흡이 수월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물속에서는 뱉는 숨인 날숨의 달인이 돼야 한다. 너무 많은 양을 한꺼번에 뱉으면 숨이 가빠져서 수영 리듬이 망가지고, 숨을 뱉지 않으면 다음 숨을 맞이할 수가 없다. 적당한 양의 숨을 물속에서 잘 뱉어내야 다음 동작을 예비할 수 있다. 수영 초창기 때는 살아남기 위해 오로지 고개를 물 밖으로 빼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면, 지금은 물속에서 적당히 콧방귀를 내뿜는 물도 잘 먹는 하마가 되었다.

모든 영법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됐을 때 물을 잘 잡거나 밀어야 한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처음에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물은 액체이고 잡히지 않는 성질인데 도대체 어떻게 잡고 밀라는 것인지 애먼 손바닥을 연거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 빠져나간 줄 알았던 물이 조금씩 잡혔다고 느껴졌을 때 비로소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런 형체가 없다고 생각한 물이 내 손에서 잡히고 밀어졌을 때 물의 모양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고, 내가 알았다고 생각한 물이 어느새 특정한 모양이 되어 내가 전혀 모르던 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사실 물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 고군분투한 수많은 시간과 함께 내가 물을 다르게 감각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시간이 물처럼 순순히 풀렸던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물에 토라지기도 했고, 물과 달리 딱딱한 내 몸이 밉기도 했다. 육지의 길은 다른 사람이 걷고 나면 발자국이 남아 그 길을 뒤에 있는 사람이 따르면 되는데, 물은 다른 사람이 지나간 길을 흔적도 없이 감춘다. 물은 모든 사람을 아우를 줄 알면서 동시에 냉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물이 맘이 조금 풀리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주름을 지그시 내비친다. 나는 저녁 노을 빛이 수영장 창문으로 들어와 물결에 부서져 있는 시간을 알고 있다. 주홍과 푸른 빛을 선연히 띤 채 넘실대는 물의 주름을 마주한 날에는 더 이상 물을 미워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장참미 작가의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는 수영장 대신 클라미밍을 하는 암장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암장에서 보낸 시간과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이름들을 책 속에 정성스레 배열한다. 그가 책 속에 심어놓은 다정함과 클라밍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바라보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 수영장 1층에 있는 유리벽 너머에 클라이밍장이 떠오른다. 장 작가의 좋아하는 마음은 나와 클라이밍장 사이에 놓인 유리벽을 허물고,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과 누군가의 손과 발을 기다리는 홀드들 사이로 나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발생하는 작은 숨소리를 경청하고 어깨를 토닥이는 어느 누구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도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윽고 나도 참지 못하고 수영장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실토하게 된다. 어떤 책은 순전히 감상하게끔 내버려두지 않고 고백의 용기를 주기도 한다. 캠프파이어 현장, 옆 친구의 소중한 마음을 가까운 곳에서 들었으니 이번에는 내 순서가 되었다.